나는 원화가 혹은 컨셉 아티스트(Concept Artist)라고 불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프로로써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스스로 그림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림 그리는 것이 재밌었고, 못 그려서 그랬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도 나름 뚜렷했다.
십 년 정도 전문가로서 일을 한 지금은 안타깝게도 더 이상 그림 그리는 것에 재미를 못 느끼고,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고 어떤 디자인이, 어떤 그림이 좋은 것인지도 잘 모르게 돼버렸다.
왜 그런지 생각해봤는데,
아트 디렉터가 아닌 이상, 내 직업이 남을 위해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라는 점이 가장 크다. 남의 프로젝트에, 남이 짠 스토리와 컨셉에 맞는 디자인을 해서, 남한테 좋은지 안 좋은지 피드백과 컨펌을 받는 직업인 것이다. 팀의 일원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직업이 안 그렇겠냐만은, 기본적으로 "아티스트의 마인드"를 가지고는 더 일하기가 힘든 구조인 것이다.
아티스트라면 자신이 그리고 싶은 세계가 있고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이 있기 마련인데, 특히나 그런 것들이 맞지 않는 프로젝트나 디렉터와 일을 한다면 더욱 힘들어진다. 반대로, 자신의 스타일, 취향과 일치하는 프로젝트나 디렉터와 일을 하게 된다면 마음껏 신나게 날개를 펼치며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십 년 이상을 컨셉 아티스트로써 일하면서 정말 다양한 프로젝트와 디렉터들과 일을 해왔다. 최고의 디렉터를 만나 좋은 시너지를 내면서 재미있게 일했던 경험도, 존경하는 아티스트를 디렉터로 만나 배우면서 일했던 값진 경험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프로젝트의 스타일에 맞게, 디렉터의 취향에 맞게 "맞춰준다"라는 느낌으로 일을 했다. 일 년, 이 년 경험이 쌓일수록 아티스트의 마인드를 가지고는 이 업계에서 오래 일하기 힘들겠다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의 에고(ego)가 강할수록 취향과 맞지 않는 피드백을 견디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했지만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던 디자인에 대한 디렉터의 평가가 예상과는 다를 때, 피드백을 수용하고 고칠 것인가 아니면 아티스트의 자존심을 부릴 것인가? 나는 피드백을 수용하는 것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프로젝트를 위해서도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더 나은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는가? 십 년 이상을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고, 업계 최고의 회사에서 최고의 팀원들과 일해왔지만 스스로 아티스트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쉬는 날에 개인적으로 그림을 그려보려고 백지를 마주하면 남의 디렉션 없이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까먹어 버렸다. 심각하다. 심각해.
일을 그만두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슬슬 일보다는 아티스트로써의 자아를 찾고 싶은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나는 솔루션 두 가지는 아트 디렉터나 리드 아티스트가 되어서 내 그림 자체가 프로젝트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아니면 개인작업을 죽이 되든 밥이 되는 꾸준히 해보는 것이다. 개인 작업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속해서 내 스타일 자체를 먼저 찾아야 그 이후 디렉터가 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 시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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